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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중편] 주고받기 2 (아카스가)

하이큐
중편
작성자
휘엔
작성일
2018-01-21 15:38
조회
375
[중편] 주고받기 2
written by 휘엔


"...다녀왔습니다아..."
"스가!"

집을 나갈 때, 그리고 집에 돌아올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기로 약속했던, 둘이서 살기 시작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었던 인사말을 혹시라도 자고 있을까 조용히 말한 보람도 없이, 곧바로 배려한 대상의 목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오, 다이치. 안 자고 있었네? 몸 상태는 어때?"
"보는 대로. 이젠 괜찮아."
"다행이다. 치카 씨는?"
"아까 돌아갔어."
"잘됐네."
"그것보다 너, 어디 갔었어?"

안 들어와서 걱정했잖아. 라고 다급하게 말하는 모습이 왠지 웃겨서 작게 웃자, 그런 나의 태도가 불만스럽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며 그가 입을 삐죽였다.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웠던 고등학교 때도 그다지 볼 수 없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더더욱 희귀해진 그의 이런 얼굴을 아는 사람은, 적어도 성인이 된 뒤의 교류 관계에서는 없었다.

"나 친구랑 마시고 걔 집에서 자고 왔어. 치카 씨한테 얘기해놨는데 못 들었어?"
"듣긴 했는데, 그래도 걱정되잖아."

특히 연하라는 것에 약간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다이치는 언제나 그녀의 앞에서 평소보다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으니, 그녀는 이런 그의 모습을 모를 것이다. 그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고 유쾌했다.

"저기요? 다이치는 우리 엄마예요? 내가 애도 아닌데 하룻밤 가지고 뭘 그렇게 걱정해."
"네가 외박하는 성격도 아니고, 이런 일이 처음이니까 그런거지. 친구 누구?"
"너 모르는 친구야.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고 들어왔으니 걱정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너야말로 괜찮아졌다고 그렇게 일어나있지 말고 확실하게 나을 때까지 다시 푹 쉬어."

괜히 그와 치카 씨 때문에 나간 것 같아서-사실이긴 했지만- 미안해하는 다이치의 어깨를 툭 치고 쉬겠다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확실히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고 들어오긴 했지. 덕분에 망친 면접과 다이치 커플에 대한 우울함을 떠올릴 틈조차 없었으니까.

아침에 눈을 뜨니 낯선 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멍한 머리로 상황파악을 위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확 몸을 일으켰다.

"으어어..."

아니, 일으키려고 했지만 곧바로 덮쳐 온 엄청난 통증과 함께 그대로 다시 뒤로 넘어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신음을 내뱉고 있자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와라 씨, 일어나셨어요?"

겨우겨우 고개만 돌려 옆을 보니 방 주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서 있었다. 엉망인 나와 달리 그는 깔끔한 모습이라 민망했지만, 어떻게 고쳐보고 싶어도 술독에 빠졌다 나온 몸이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아카아시 군...좋은 아치임..."
"...다시 아카아시 군이 되어버렸네요."
"에...?"
"어제는 케이지라고 편하게 불러주셨는데..."
"엣? 거짓말! 진짜?"

아쉽다는 듯이 흐려지는 얼굴에 놀라 숙취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자 그의 표정이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농담이에요. 하지만 '군'은 떼고 불러주셨어요."
"아, 진짜...놀라게 하지 마..."
"하하."

어제 중간부터 기억이 없었다. 깔끔하게 잘린 필름 조각을 찾으려 머리를 굴려봤지만, 이미 광란의 카오스에 휩쓸려 사라진 조각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

"어제 어디까지 기억나세요?"
"...건배한 것까지...?"
"몇 번째요?"
"그러게...몇 번째일까..."

이렇게 깔끔하게 기억이 날아간 것은 술을 배운 뒤 처음이었다. 필름이 끊긴 채 온갖 주정을 다 부리고 다음날 흑역사 생성과 숙취의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지인들의 모습과 지금 내 모습이 겹쳐졌다. 필름이 끊긴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기억이 없어서 더 불안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추태를 부렸을 것이 뻔한 내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기도 했다. 만일 어제의 장면이 리플레이 되었다면 난 지금쯤 저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과 싸웠을 것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던 그동안 술친구들을 마음껏 놀렸던 과거의 과오를 반성했다. 그렇게 한참을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자기반성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현재 누워있는 곳을 깨달았고, 동시에 다시 한번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미쳤어. 이거 아카아시 군의 침대야.

"진짜 미안, 아카아시 군. 기억은 안 나지만 여러 가지로 민폐 끼쳤지..."
"아니요, 민폐는요. 덕분에 저도 즐거웠어요."
"그치만 나 침대까지 차지하고..."

그냥 바닥에 버려놓지 그랬어. 미안함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손님을 그대로 주무시게 할 순 없으니까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구석을 보니 손님용으로 보이는 이불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힘드시면 더 주무셔도 돼요."
"아냐! 일어나야지!!"
"그럼 뭐 좀 드실 수 있으세요? 변변찮은 것들이지만."
"엣...그래도 돼?"
"물론이죠. 혼자 먹기 쓸쓸한걸요."

준비할 테니 천천히 일어나세요. 그가 다시 문을 닫고 나가고 곧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준비하는 소리가 문 너머 부엌에서 들려왔다.

“으어어어...진짜 스가와라 코우시...미쳤어미쳤어...”

거의 초면과도 다름없는 연하한테 도대체 얼마나 폐를 끼친 거야. 민망함을 넘어 수치심까지 느끼며 애꿎은 베개를 쥐어짜듯 끌어안고 그대로 얼굴을 박았다. 분명히 지금 자신의 얼굴은 인간의 얼굴이 아닌 한 알의 토마토일 것이 뻔했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무리 잘 쳐줘도 아침이라고 말하기 힘든 시간이었다. 도대체 남의 집에서 얼마나 편하게 잔 거냐, 나란 놈은.

기억에 없는 흑역사를 상상하며 다시 얼굴을 베개에 묻고 최대한 냉정함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와르르 무너진 멘탈을 지금 당장 부여잡는 것은 무리였다. 내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어. 내가 안고 가야지.

각오를 다지고 일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안고 있는 베개를 꼬옥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자, 낯선 냄새가 비강을 간질였다. 사라질 듯 연한데도 확실히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그것이 이 방 주인의 흔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이게 아카아시 군의 체취구나. 뭐라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다이치와는 확연하게 다른 체취였다. 왠지 포근하게 느껴지는 그 냄새에, 그대로 킁킁거리며 다시 한번 숨을 들이쉬자 왠지 기분 좋은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에 맴돌았다. 이래서 푹 잔 건가.

“스가와라 씨. 준비 다 됐는데 드실 수 있으세요?”

이상하게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그 체취를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 나도 모르게 베개에 다시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려던 그 순간,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어, 응! 머, 먹을 수 있어!"
"그럼 들어갈게요."

문이 열리고 쟁반을 손에 든 그가 들어오는 걸 보며 순간적으로 그동안 닦아온 포커페이스를 최대한 발휘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미쳤어, 진짜. 도대체 방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야. 숙취야? 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야? 미친 거 아냐, 진짜? 사람이 그리웠나? 굶주린 거야? 대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이 복잡하게 얽혀 뇌를 흔들어놓았다.

"스가와라 씨? 괜찮으세요? 역시 조금 더 주무시는 게..."
"아냐 아냐! 완전 괜찮아! 우와~ 맛있겠다!!"

금세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여 주의를 돌렸지만, 말한 내용은 거짓이 아니었다.

흰 쌀밥. 미소국. 예쁘게 말린 계란말이와 나물과 같은 간단한 밑반찬.

"해장용 상이 아니라 죄송하네요."
"무슨 소리야! 완전 너무 훌륭해서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인데."

빈말이 아니었다. 눈앞에 차려진 상은 정갈하고 훌륭했으며, 숙취 따윈 일순 날아갈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 입에 침이 고였다.

"이거 다 아카아시 군이 만든 거야?"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반찬도 있고, 제가 만든 것도 있고 그래요."
"와...무려 요리하는 남자...아카아시 군, 안 그래도 인기 많을 텐데 주변에서 가만히 안 놔두겠다."
"안 그래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귀 끝이 조금 붉어진 게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조금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지만, 놀리는 대신 수저를 들었다. 놀리고 싶은 장본인이 애써 만들어 준 음식이 식어가는 게 둘 순 없지 않은가. 맛있는 음식을 식어가게 두는 것은 죄다.

"잘 먹겠습니다아—!"

무엇부터 먹을까 고민하다 작은 두부가 동동 떠 있는 미소국을 마셨다. 코끝을 자극하던 맛있는 냄새처럼 맛도 훌륭했다. 따끈한 국물이 술로 혹사당했던 몸을 달래주는 게 느껴졌다. 감탄사를 내뱉는 시간도 아쉬워 정신없이 수저를 놀리다가, 문득 건너편이 조용해진 것을 느끼고 시선을 올리자 깊은 청록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아...미안...나만 너무 먹었지..."

민망함에 슬그머니 수저를 내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순식간에 바닥이 드러난 내 밥그릇과는 달리 그의 밥은 아직도 반 이상이 남아있었다.

"아뇨. 입에 맞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입에 맞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너무 맛있어. 아카아시 군, 어디서 요리 배웠어?"
"아뇨, 혼자 살면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간단한 것 밖에 못 하지만요."

빈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짜 너무 맛있었다. 진심을 담아 말하자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왠지 기뻐 보여 민망함이 조금은 가셨다.

"모자라면 말씀해주세요. 더 있으니까요."
"응!"

부드럽게 말한 뒤 단정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는 모습이 무슨 광고의 한 장면 같아서 순간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짜 여자들이 가만 안 놔두겠다.

"잘 먹었습니다!!"

결국, 식사를 마친 건 한 공기 반을 더 먹은 뒤였다. 배가 고팠던 건 아니었고, 오히려 숙취 때문에 별로 못 먹을 것 같았는데 술술 들어가는 게 신기했다.

“근데 아카아시 군, 언제 일어났어?”
“9시쯤 일어났어요.”
“으아-진짜? 깨우지 그랬어.”
“어제 여쭤봤을 때 오늘 딱히 일정 없다고도 하셨고, 너무 곤하게 주무시고 계셔서요.”

그건 또 언제 대답했대. 당연히 대답한 기억조차 없었다. 취한 상태에서도 제대로 대답은 한 게 신기했지만 잠시 밥을 먹으며 잊었던 공포가 되살아났다. 진짜 어제 헛소리한 건 아니겠지...?

“나 진짜 어제부터 너무 민폐다...”
“민폐 아니에요, 정말. 근데 스가와라 씨, 어제 기억 정말 하나도 안 나세요?”
“나 이렇게 필름 끊긴 거 태어나서 처음이야.”
“진짜요?”
“나 어제 주정 심했어? 실수한 건 없고?”
“딱히 주정 없으셨어요. 실수한 것도 없으셨고요.”
“진짜? 안 숨겨도 돼.”

자신의 다급한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그였지만, 그런 그에게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거의 초면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그이니 그 어떤 진상짓을 했어도 온화하게 웃으면서 넘어가 줄 것 같아서 더더욱 불안했기 때문이다.

“진짜예요. 중간까지 평범하게 마시고 계시길래 취하신 줄도 몰랐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의 대답에도 찜찜함은 가시지 않았다. 불안함과 의심의 눈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그의 얼굴을 힐끗 보았지만, 뒷정리를 하는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 이상 무얼 캐낼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정리를 도왔다.

“스가와라 씨, 조금 더 쉬실래요? 아니면...”
“아냐 아냐! 이 이상 아카아시 군 방해하는 것도 미안하고, 집에 가야지!”

허둥지둥, 옷을 찾으러 두리번거리자 잘 개어진 옷과 새 칫솔, 그리고 타올이 내밀어졌다. 아니, 잠깐. 옷은 또 언제 갈아입었지? 다급히 몸을 내려다보자 다행히 바지는 자신의 것이었지만 헐렁한 티셔츠는 명백히 방 주인의 것이었다. 일어나서 밥 실컷 먹고 이제야 이 사실을 깨달은 자신은 엄청난 바보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정신 못 차릴 셈이야, 스가와라 코우시.

“어제 술이 쏟아져서 부득이하게 제 옷 드렸어요.”

옷은 내가 갈아입은 건가? 설마 아카아시 군이...? 묻기가 두려웠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오밤중의 날벼락, 못 볼 꼴 봤을 거라는 건 틀림없으니까. 창피함에 눈을 피하며 옷을 받아들자 빨래에 다림질까지 한 건지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접힌 티셔츠에서 섬유유연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고, 고마워, 아카아시 군...”

나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미소지은 채 방문을 닫고 부엌으로 나갔다. 천천히 준비하라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더는 그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방 한쪽에 잘 정리되어 있던 자신의 가방과 물건을 챙겼다. 욕실을 빌려 빠르게 세수와 양치까지 끝내고 나오자, 외출 준비를 마친 그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카아시 군도 나가?”
“어제 깜빡하고 안 산 게 있어서요. 그거 사러 나가려고요.”

가볍게 지갑과 휴대폰만 든 그의 모습이 무더운 여름과 어울리지 않게 청량했다. 퉁퉁 부은 얼굴과 물로 열심히 눌렀지만 결국 정리하는 데 실패한 까치집 머리로 서 있는 자신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했다.

현관문을 열자 한여름의 더운 공기와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덮쳐왔다. 온몸을 찌르는 여름의 상징을 그대로 느끼며 천천히 어제 걸어온 길을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옆에서 말없이 걷는 그와 나 사이의 침묵이 싫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역까지 가서 헤어지기엔, 내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았다.

“아카아시 군, 진짜 미안해. 아무리 생각해도 나 너무 민폐였지. 하룻밤 재워준 것도 모자라서 침대도 뺏고 맛있는 아침도 얻어먹고. 어제 술값도 아직이잖아.”
“안 주셔도 돼요.”
“어떻게 그래...”

여유로운 그의 목소리와는 달리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그런 나를 보며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럼 다음에 밥 한번 사주세요.”
“그걸로 되겠어? 당연하지! 얼마든지 사줄게! 뭐 먹고 싶어?”

한 번뿐이랴, 몇 번이고 사줄 수 있었다. 조바심을 내는 나를 달래듯 그의 목소리가 사근사근했다.

“다음에 같이 결정해요.”

그러니 번호와 라인 아이디 알려주세요. 덧붙여진 마지막 말과 동시에 내밀어오는 휴대폰을 보자, 아직 서로 번호조차 교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번호와 이름을 주소록에 저장하고 그의 휴대폰을 돌려주자 그가 화면을 톡톡 두드린 뒤, 미소와 함께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잠시 뒤,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라는 심플한 문장이 화면에 떠 있었다. 赤葦京治. 주소록에 그의 이름과 번호를 저장하자 앞으로도 연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활짝 웃었다. 예전 합숙때부터 느꼈던 거였지만 그와는 왠지 잘 맞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라도 그와 다시 재회해서, 그리고 그와 또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다음에 같이 뭐 먹지. 아카아시 군은 뭘 좋아할까. 알고 있는 맛집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데, 옆에서 걷고 있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깊은 청록빛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혹시...스가와라 씨만 괜찮으시다면,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뭔데?”

왠지 그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그라면 곤란한 부탁도 하지 않을 테지만. 살짝 망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카아시.”
“응?”
“아카아시 군이 아니라, 아카아시라고 불러주세요.”
“에...?”
“아니면 케이지라고 불러주셔도 되고요.”
“으아아악!”

케이지라고 부른 건 농담이라고 했지만, 기억이 없으니 진짜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 새 잊고 있던 기억 너머의 진상 짓을 다시 떠올리고 머리를 감싸 쥐는 나를 그는 웃으며 배웅했다.

진짜 불렀으면 어떡하지. 데굴데굴. 무릎을 감싸 안고 좁은 침대를 구르는 와중에, 장난스럽게 덧붙이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웃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 스쳐 지나갔던 건 불안감과 긴장이었다. 뭐 그리 어려운 부탁이라고.

어제 그 추태를 봤으니 내가 무섭진 않을 텐데.

의문과 함께 찾아온 갈증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엌으로 나가자 물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부엌이 눈에 들어왔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못 보던 반찬들이 가득했다. 다이치나 자신의 부모님이 반찬을 보내주실 때 이외에는 보기 힘든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이 얼마 남지 않은 페트병을 꺼내 단박에 들이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들어가 더운 몸을 식혀주었다.

"크어어, 시원하다!"

명백하게 아저씨 같은 탄성을 내뱉으며 냉장고를 닫고 빈 페트병을 분리수거용 바구니에 던져넣었다. 그녀의 흔적이 가득한 부엌을 보면서도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미 어제 한번 겪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어제보다 기분이 나아져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이치의 방문은 닫혀있었다. 조용한 걸 보니 다시 자고 있거나 쉬고 있겠지. 분명 외박한 자신을 기다리느라 일어나있던 게 뻔했다. 내가 애도 아니고, 네가 자꾸 그러니까 내가 이러잖아, 바보 다이치.

씁쓸함을 그의 방을 항해 혀를 쭈욱 내미는 것으로 애써 지운 채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중고로 샀던 오래된 매트리스 스프링의 출렁임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옆으로 뉘었다. 눈을 느리게 껌뻑이자 도쿄에 올라온 뒤 쭉 나만의 공간인 작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치고는 잘 정리되어있다고 생각했던 공간은 아카아시의 방에 비교하면 어딘가 어수선했다. 이제 슬슬 이사도 할 거고, 오늘 필요 없는 물건이나 책을 좀 정리해야 할까. 뭐부터 버리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으앗!"

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휴대폰의 짧은 진동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화면을 보니 집에 오는 길에 저장했던 이름이 짧은 라인 메시지와 함께 떠 있었다.

- 잘 들어가셨어요?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왠지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 응. 잘 들어왔어! 아카아시 구

신나서 답장을 쓰다가 자연스럽게 나온 이름 뒤의 호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은 망설이던, 하지만 자신의 올곧게 향하는 그의 빨려 들어갈 것만 같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톡톡. 톡톡톡. 썼던 글자를 지우고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 아카아시는?

별것도 아닌데 큰일을 한 느낌에 왠지 뿌듯했고, 조금은 쑥스러웠다. 이제 이걸로 그 얼굴에서 불안과 긴장은 사라졌을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만큼의 호감을 갖게 하는 사람은 굉장히 오랜만이라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다음에 만나면 더 제대로 된 모습 보여주고 싶다. 물론 맛있는 것도 사주고.

“잡생각 그만하고 힘내서 방 정리하고 다시 면접 준비해라, 나!”

힘차게 침대에서 튀어 올라 털털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의 소음과 창 너머의 시끄러운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남은 하루는 아직 길었다.


2018.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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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입니다! 나름 진전...이 있는 걸까요...^^...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피드백, 오타제보는 언제나 환영입니다;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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