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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소품] 기묘한 이야기 - falling down (아카스가)

하이큐
소품
작성자
휘엔
작성일
2017-04-30 13:43
조회
968
주간 스가른 4월 넷째 주
[위선/위선자]

*직접적인 장면묘사는 없지만, 관계를 갖는 장면을 암시하는 묘사가 나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한 글입니다.*
*호모포빅한 발언이 나옵니다.*
*폭력적/충격적일 수 있는 장면이 들어가 있습니다.*
*캐붕이 심합니다.*
*스가키요 요소가 있습니다.*
*괜찮으신 분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아카아시 군~

이건 꿈인가?

- 케−이지 군~

저건 실제가 아니다.

- 케이지.

「그」라면 날 저렇게 부를 리 없으니까.


[소품] 기묘한 이야기 - falling down
written by 휘엔


그가 찾아오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 왜 그래~ 이렇게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샐쭉 웃으며 다물려 있는 입술을 열어달라는 듯, 혀로 톡톡 두드리며 보챈다.

- 「나」랑 이러고 싶었잖아.

사양하지 마. 라고 귓가에 속삭여오는 얼굴을 곁눈질로 보자 흰 얼굴에 자리 잡은 눈물점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위에서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낯설었다.

...낯설고 뭐고, 머리카락뿐만 아닌 이 상황부터가 비현실적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시작된 꿈은 날이 갈수록 생생해졌다.

“아카아시. 무슨 일 있어?”

얼굴색이 안 좋아. 걱정스럽게 말해오는 그에게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상냥한 그의 얼굴은 여전히 걱정으로 물들어있었다. 옅은 회색의 눈썹이 추욱 쳐져 있는 모습에 미안해져 애꿎게 빈 커피 컵만 만지작거렸다. 이미 벤티 사이즈를 비웠지만, 몸은 여전히 피곤에 쩔어있었다.

“스가와라 씨. 수업 끝나셨죠? 이제 뭐 하세요?”

시험 때문에 오랜만에 만나는 그였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조금 더 그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 마침 저녁 시간이니 함께 맛있는 게 먹고 싶었다.

“아, 나 조금 이따가 키요코랑 만나서 저녁 먹기로 했어.”

3년을 배구부에서 함께 보낸 사이이자, 현재는 그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된 쿨뷰티 계의 여자. 칠흑을 닮은 머리칼과 차가운 인상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시군요.”
“아카아시도 같이 안 갈래?”

안 그래도 키요코가 네 얘기 하더라고. 요즘 자주 못 봤다면서. 맑게 웃으며 권하는 그의 말에 커피 컵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종이컵은 다행히 구겨지지 않았다.

“아뇨. 전 모처럼 일찍 끝났으니 집에 갈까 해요. 사실 요 며칠 잠을 좀 설쳐서 일찍 자려구요.”
“그렇구나. 아쉽네.”

시미즈 씨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데이트 잘 하시구요.

자신의 말에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장난스럽게 웃고 그가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씁쓸함을 애써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내며 집으로 돌아오자, 집 안에는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자 아무것도 없었다. 장을 보러 나갈 의욕도 생기지 않아 찬장을 뒤적여 컵라면을 꺼내 물을 부었다.

어두워져 가는 거실을 멍하니 보며 상상했다. 그는 그녀를 어떻게 안을까. 그 손으로 그녀를 어떻게 만지고 어떻게 만족 시킬까. 그는 어떤 표정으로 만족할까. 그 흰 피부는 흥분과 열기로 붉게 물들어가고, 그의 등에는 그녀가 남긴 붉은 선이 자리 잡겠지.

붉어진 피부와 그 피부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상상하자 입안이 말라 갔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목울대의 움직임이 왠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컵라면은 퉁퉁 불어있었다. 먹기 싫은 비주얼이라 그냥 개수대에 부어버렸다. 어두컴컴해진 방을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아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냥 자고 싶었다. 잠들어서 그와 그녀가 함께 있는 모습을 지우고, 없애버리고 싶었다.

- 나 많이 보고 싶었나 봐?

밥도 안 먹고 바로 잔 거 보니까? 키득키득 웃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어김없이 밤을 닮은 눈동자가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한껏 장난기를 담은 눈동자가 방을 비추는 달빛을 머금자, 짙은 보랏빛이 스쳐 지나갔다. 시시각각 변하는 눈동자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이게 바로 홀린다는 걸까.

- 보니까 좋아?

자신의 허리에 올라타 있는 그가 나른한 몸짓으로 상체를 숙여 자신에게 밀착해왔다.

- 케~이지. 뭐라고 말 좀 해봐.

굳게 다물고 있는 입술에 하얀 손가락이 다가와 갈라진 부분을 살살 간질였다. 그 손끝을 깨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참아냈다.

- 흐응- 재미없어.

그런 나의 모습에 삐죽 입술을 내민 그가 이내 표정을 풀고 혀를 내밀어 가볍게 입술을 훑었다. 입술 사이로 삐져나왔다가 사라진 혀의 빨간 빛이 잔상처럼 어른거리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가 고개를 숙였다.

- 그럼 재밌는 거 해야지~

그의 새로운 목표는 내 목덜미였다. 고양이가 할짝이듯 살짝살짝 닿던 혀는 점점 아래로 향해, 그 아래의 쇄골을 강하게 빨아 들었다.

- ...읏.
- 후후. 케이지 군은 언제까지 버틸까?

분명 꿈인데. 이게 꿈이 맞는 걸까.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감각들이 너무나 리얼해 혼란스러웠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허리 밑에 힘이 들어갔다.

- 대단하네, 케이지는~

사실 멋대로 움직이고 싶잖아. 「날」 쓰러뜨려서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잖아. 네 밑에서 너를 붙잡고 너만 바라보며 울게 만들고 싶잖아.

- 근데 왜 참아?

내가 여기 있는데.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눈을 감자 불만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 ...아하.

그러나 이내 터져 나온 목소리에는 유쾌함이 녹아있었다.

- 설마 「걔」를 더럽히고 싶지 않다는 거야? 네 욕망의 대상이지만 보호해주고 싶다는 그런 거?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반응에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 우와. 진짠가 봐. 세기의 순정남 나셨네! 근데 너 되게 웃기다. 걔는 성자가 아니야. 아마 지금쯤 여친이랑 한창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걸? 아, 아니면 남자랑 붙어먹는 게 이 사회에선 용납되지 못하니까? 그래서 네가 참는 걸로 보호해준다고?

세상에서 제일 웃긴 말을 들은 것처럼, 그가 내 위에서 깔깔대며 웃었다. 「그」와 같은 얼굴이 「그」와 같은 목소리로 천박하게 웃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여전히 내 허리 위에 앉아있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떨어져 나가는 대신 내 양팔을 위로 모아 강하게 내리눌렀다. 분명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 악력일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턱을 잡혀 억지로 그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조금 전까지 뿜어내고 있던 유쾌한 기색은 어디 가고, 그 눈동자가 담고 있는 것은 오로지 차가움 뿐이었다.

- 참아? 지켜줘? 웃기지 마. 그냥 상처받지 않고 싶다고 해. 버림받고 싶지 않다고 해.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고, 경멸 섞인 눈빛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해.

한 쌍의 짙은 자수정이 심연을 파헤쳐간다.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놓았던 본심이 까발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 위선자.

본심을 난도질당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나에게 경멸 섞인 비웃음이 떨어졌다.

“...크헉...쿨럭, 켁.”

그와 동시에 마치 억지로 막혀있던 산소를 보충하려는 듯, 터져 나온 기침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기침이 채 멎기도 전에 곧바로 올라오는 욕지기에 기어가다시피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한참을 변기를 붙잡고 있었지만 나오는 것은 헛구역질과 위액 뿐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 초췌한 남자가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꼴이 말이 아니었다.

거실로 나가 시계를 보이 아침 7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꼬박 12시간을 잤는데도 온몸을 얻어맞은 것처럼 몸이 쑤시고 무거웠다.

싱크대 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가보니, 자기 전에 개수대에 버린 라면 면발이 흉물스럽게 늘어져 있었다. 역한 냄새에 다시 올라오려는 구토를 참으며 개수대를 청소했다. 어제저녁에도 뭐 하나 먹지 않은 탓에 빈속이 쓰렸다. 무의식적으로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어제도 비어있던 냉장고가 오늘이라고 채워져 있을 리가 없었다. 학교 근처 카페라도 가서 뭐라도 사 먹어야겠단 생각에 준비를 서둘렀다. 배고픔을 호소하는 빈속 때문이라기보단, 얼른 불쾌한 공기로 가득한 이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뒤 카페로 향했다.

자주 애용하는 카페에 도착해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한 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카페 전체가 잘 보이지만 교묘하게 기둥에 가려져 놓치기 쉬운 위치라, 좋아하는 자리였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고소한 빵 냄새와 커피 향에 불안하게 일렁이던 마음이 안정되어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가슴을 꽉 막고 숨을 틀어막던 무언가가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카페인의 힘은 역시 대단했다.

오늘은 수업도, 다른 예정도 없는 날이었다. 간만의 휴일에 일정이 없다고 해도, 딱히 어디 놀러 가거나 할 체력도 기분도 아니었기에 대신 레포트를 쓸 예정이었다. 제출일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뭐라도 집중해서 하지 않는다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침 시간의 소란스러움이 점차 가라앉고, 잔잔한 음악과 자신처럼 각자의 일에 몰두하는 손님들이 만드는 조용한 소음이 카페 안을 채웠다. 입학 초기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발견한 이 카페는, 크지는 않지만 주인의 성격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었다.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 위치해 아는 사람만 아는 카페였지만, 그만큼 아늑하고 따뜻해서 좋아하는 장소였다. 물론 맛있는 커피와 메뉴도 한몫했지만.

“아카아시 군. 오랜만인 것 같다?”
“하하, 그런가요. 최근에 좀 바빠서 자주 못 들렀네요. 잘 지내셨죠?”

하나둘 손님이 떠나고, 남은 손님이 나 하나가 되었을 때, 이미 예전에 얼굴을 터놓은 카페 사장님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나야 똑같지, 뭐. 근데 아카아시 군이야말로 얼굴 꼴이 왜 그 모양이야? 어디 아파?”

사장님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애써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은데, 남들이 보긴 더 하겠지.

“요즘 바쁘기도 했고, 잠도 좀 설쳐서 그런가 봐요. 그렇게 심해 보이나요?”
“그걸 말이라고 해? 잘생긴 얼굴 다 망치잖아.”
“하하하.”

정말로 속상하다는 듯 말해오는 사장님이 먹는 거라도 잘 먹으라며 딸기 케이크를 서비스로 내주었다. 노트북을 덮고 한동안 사장님의 유쾌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자신은 주로 이야기를 들으며 맞장구치는 게 다였지만, 그의 밝은 목소리에 내 안에서 일렁이던 어두운 괴물이 물러나는 느낌이었다.

- 딸랑딸랑.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맑은 종소리를 울리며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존재가 내 안의 어둠을 다시 불러 세웠으니까.

“카페라떼 하나요.”

조용하지만 단번에 청각을 사로잡는 청아한 목소리. 못 본 척하고 싶었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길고 검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고개를 돌리는 이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미즈 씨.”

예상치 못한 만남인 건 상대로 마찬가지였는지, 좀처럼 표정변화가 없는 그녀의 눈이 크게 열리며 자신을 향했다.

“아카아시 군. 오랜만이야.”
“그렇네요. 잘 지내셨죠?”
“응. 그런데 아카아시 군은 괜찮아?”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진심으로 걱정을 담고 있는 눈동자를 마주 보기가 힘들어 웃기가 힘들었다.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에 음료가 준비됐다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 대신 음료를 가져오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맞은 편에 자리를 잡은 그녀의 앞에 음료를 놓았다. 맛있는 커피의 향이 올라오는 라떼에는 귀여운 토끼가 방긋 웃고 있었다. 사장님의 혼신의 라떼아트를 본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그녀의 맞은편에 다시 앉자,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마침 잘 됐다며 핑크색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어제 코우시한테 아카아시 군이 요즘 잠을 잘 못 잔다고 들어서.”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챙긴 건데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네.

“괜찮다면 받아줄래? 괜한 오지랖일지도 모르겠지만...”

양해를 구하고 안을 보니 여러 종류의 티백이 들어있었다.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걸로 가져왔는데, 혹시 내가 괜한 일을 했다면 미안해.”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상냥한 여자였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있으면 참 잘 어울리는 여자.

“괜한 일이라뇨. 일부러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미즈 씨.”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이자, 걱정스러워 보이던 그녀가 그제야 편하게 웃음 지으며 다시 한 모금 커피를 마셨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차게 식어갔다.

“시미즈 씨. 오랜만에 만났는데 죄송하지만, 저 이제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아, 응. 바쁜데 붙잡아서 미안했어, 아카아시 군.”
“아닙니다. 저야말로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서둘러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섰다. 손에 들고 있는 작고 귀여운 봉투가 무겁게 느껴졌다. 봉투 안에서 검고 찐득한 무언가가 나와, 손등을 타고 팔을 거슬러 올라가 목을 움켜쥐는 느낌이었다.

봉투를 내동댕이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애써 뚫어놨던 숨통이 다시 막혀왔다. 거의 달리다시피 집으로 돌아와 들고 있던 봉투를 던졌다. 거칠게 땅으로 곤두박질친 봉투에서 색색의 티백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멍하니 그 장면을 보다가, 그의 눈동자 색을 닮은 올리브색 봉투를 집어 들었다. 물을 끓이고 티백을 넣자 좋은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오리지널 블렌딩인지, 처음 보는 종류였지만 맛도 향도 내 취향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잔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 여전히 바닥에 널려있는 티백을 모아들고 식탁 앞에 앉았다. 수면에 좋다고 유명한 카모마일부터 자스민차, 국화차, 허브차 등등, 참 종류도 많았다. 고심해서 신경 써 준 티가 나는 셀렉션이었다. 그것들을 가만히 보다가 하나하나씩 포장을 뜯어 티백을 꺼내 모았다. 그리고 티백들을 가위로 잘라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휴지통에 팔랑거리며 쏟아져 내려가는 잎들을 보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마지막 한 개까지 티백을 비우고 티백 껍데기까지 정리해서 버리자, 어수선했던 식탁 위가 다시 깔끔해지고 허브 티가 담긴 컵만이 식탁 위에 남았다. 따뜻한 걸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식은 티도 그 나름대로 괜찮았다.

그날은 오랜만에 꿈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
.
.
.
며칠 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학생식당에 가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스가와라 씨, 여기 앉아도 괜찮을까요?”
“아, 아카아시! 수업 끝났어?”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의 모습에 긴 수업으로 지친 정신이 맑아졌다. 그의 반대편에 앉자 그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 이 미소가 보고 싶었다.

“불면증은 좀 어때? 저번보다 얼굴색이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스가와라 씨가 걱정해주신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자신의 대답에 안심했다는 듯, 걱정으로 가득하던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다행이다~”

상체를 테이블 위로 길게 늘어뜨린 그의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열려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조금, 아주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카락이 흩어져있었다. 부드러운 저 머리칼의 감촉을 느끼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

“아, 맞다!”

그러니 뻗은 손은 곧바로 고개를 든 그의 동장에 애꿎게 허공만 붙잡고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갔다.

“아카아시. 나 고민이 있는데 상담 좀 해줄래?”
“스가와라 씨가 웬일로 제게 상담이라니. 뭔데요?”
“프러포즈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

하마터면 들고 있던 수저를 놓칠 뻔했다. 지금 그가 뭐라고 그런 거지? 프러포즈?

“키요코는 이벤트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긴 하는데, 그래도 한번 하는 프러포즈니까 요란스럽게는 안 해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하고 싶어서.”

그런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미치겠다며 그게 거칠게 뒷머리를 헝클었다.

“...글쎄요. 저도 프러포즈는 해본 적이 없어서요.”
“으으~ 역시 그렇지? 그치만 아카아시도 이벤트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니까, 조금은 심리를 이해해보자는 느낌으로 물어보고 싶었는데~”
“애초에, 전 여자가 아니니까 시미즈 씨가 생각하시는 것과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가아~”

자신의 말에 머리를 부여잡고 테이블에 다시 늘어진 그를 보는 시야가 흐릿해졌다. 맑아졌던 정신이 다시 혼탁해지고, 피곤함이 덮쳐왔다.

“도움이 못 되어드려서 죄송해요.”

왜 그 여자야.

“하지만 시미즈 씨라면 스가와라 씨가 해주시는 건 다 기쁘게 생각하실 거라고 전 생각해요.”

왜 난 안 되는 건데?

“으으~ 역시 아카아시! 무뚝뚝해 보이지만 상냥해~”

그 여자 따위보다 내가 더 잘해줄 수 있는데.

“아카아시 연인 될 사람은 좋겠다아~”

내가 당신을 더 사랑할 수 있는데.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는데. 왜. 왜. 왜.

“하하. 얼른 찾으면 좋겠네요.”

웃고 있지만 과연 내가 제대로 웃고 있을까.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 근육이 경련할 것만 같다. 평소에는 눈치가 빠른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프러포즈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상태를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참 고마웠다. 이렇게 추악한 나를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

“아, 스가와라 씨. 저 약속 있는 걸 깜빡했네요. 실례지만 먼저 일어날게요.”
“그렇구나. 간만에 본 것 같은데 아쉽네.”
“다음에 같이 술이라도 해요. 좋은 아이디어 찾으시길 바랄게요.”
“응! 고마워!”

끝까지 문드러져 가는 내 속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가 손을 흔들며 날 배웅했다. 질투로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아. 속으론 그따위 프러포즈, 확 망해버리라고 저주를 내뱉으면서 겉으로는 응원한다고 말하는 나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이거야말로 완벽한 위선이지.

눈이 뻑뻑해지고 온몸이 무거웠다. 그냥 자고 싶었다. 잠들어서 모든 걸 잊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검은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왔네, 위선자 씨.

그리고 눈앞에 어둠을 닮은 새까만 머리칼이 나타났다. 그렇게도 원하던 회색이 아니었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그에게 달려들어 입술을 부딪쳤다. 그대로 먹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거칠게 움직이자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거친 취급이 맘에 안 드는지 입을 삐죽이는 걸 못 본 체 하며 눈물점을 혀로 핥자, 그제야 그가 맘에 든다는 듯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 「나」는 안 안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그를 침대 위로 내팽개치자, 그가 꺄르르 웃으며 침대 위를 굴렀다.

- 아니면 그 순정남 놀이는 끝이야?

잔뜩 비꼬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의 몸 위에 올라가 그를 가두었다.

- 그 사람이 행복하다면 난 괜찮을 줄 알았어.

조용히 내뱉는 내 말에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 하지만 그건, 네 말대로 위선일 뿐이지.

어차피 가질 수 없는 사람, 꿈에서라도 가지고 싶으니까.

내 말에 그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에게선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행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앞의 그가 날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손을 잡아채 머리 위로 모아 내리누른 후,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그런 나의 행동에 밑에 깔린 이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그 몸을 맘대로 유린하고 있는 건 나인데, 그만큼 끈적한 무언가가 내 전신을 감싸는 감각에 사로잡혀 조종당하는 느낌이었다.

“아카아시 군, 괜찮아? 어째 저번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이는데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아뇨. 전 괜찮습니다.”

매일 밤, 그는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마음 가는 대로 그 몸을 안았다. 점점 뜨거워지는 나와는 반대로, 그의 몸은 언제나 차가웠다. 그 냉기에 처음엔 거부감이 없었던 게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몸을 섞을수록 그런 건 더 이상 상관없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나 자신이 점점 미쳐간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내 품 안에서 울고 있는걸.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구도 아닌, 내 품 안에서.

“아카아시.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얼굴색이 너무 안 좋아.”
“전 괜찮아요, 스가와라 씨.”

그렇기에 그의 왼손에 못 보던 반지가 끼워져있는 걸 봐도 더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꿈속의 그가 진짜든 가짜든 이젠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중요한 사실은 내가 「그」를 안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가 내 밑에서 신음하고 내 이름만을 부르며 환의 섞인 울음을 내뱉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 시간 동안 그 사람은 오로지 내 것이니까.

- 케이지.

이 세계에서라면 당신을 온전히 가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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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오전 10시경, 도쿄도 ㅇㅇ구의 한 맨션에서 목을 맨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피해자는 xx대학에 재학 중이던 22세 A 씨. 최초 발견자는 피해자의 학교 선배인 S 씨로, 며칠 동안 연락이 되지 않는 A 씨를 걱정한 S 씨가 맨션을 방문했다가 피해자를 발견한 뒤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피해자는 평소 원만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주위 사람과 큰 문제가 없었다는 지인들의 말에 따라, 경찰은 자살과 타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진행할...]




April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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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어어...처음 쓴 아카스가 글이 이런 글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8ㅅ8

해피엔딩을 지향하는 1인으로서, 이런 분위기의 글은 처음 쓰는지라 쓰면서도 사실 조금 힘들었네요; 처음엔 단순히 흑스가가 보고 싶어서 가볍게 시작한 글이었는데, 점점 어두워지더니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다 쓰고도 이런 내용으로 괜찮은가 걱정하고 있네요;

어두운 글이었지만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리고, 다음에는 꼭 밝은 아카스가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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