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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단편] Unreliable relationship (side O)(우시오이)

하이큐
단편
작성자
휘엔
작성일
2017-02-20 23:38
조회
1577
[단편] Unreliable relationship (side O)
witten by 휘엔

 

- 중간중간에 비속어가 들어가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원작 기반 미래 AU

 

 

 

목이 까끌까끌했다.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려다가 바싹 마른 입 안이 느껴져 헛웃음을 흘리며 비척비척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반쯤 감은 눈으로 침대 옆 탁자에 놓았던 페트병을 들어 입에 털어 넣자 목 안으로 쪼르륵 물줄기가 떨어지다가 멈추었다. 야속하게도 딱 목만 살짝 축일 수 있는 양이었다. 한 방울이라도 더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 빈 통을 흔들다가, 몇 시간 전에 자다가 갑자기 기침이 터져서 꽤 많은 양의 물을 마셨던 것을 기억해내곤 그대로 들고 있던 페트병을 방 한구석으로 던져버렸다.

퉁. 퉁. 1.5L짜리의 페트병이 빈 소리를 내며 가볍게 바닥을 튕기다 또르르 방 한구석으로 굴러 벽에 부딪혀 멈췄다. 작은 방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가 왠지 처량해 웃으며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목이 맹렬하게 수분을 요구했지만, 그것보다는 귀찮다는 감정이 강했다. 물을 가지러 가는 대신 탁자에 뒤집어놓았던 휴대폰을 들자 부재중 전화 몇 통과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알림창을 점령하고 있었다.

부재중 전화 하나는 같은 과의,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1년 선배. 꽤 귀엽게 생긴 얼굴에 이것저것 잘 챙겨줘서 이번 과제 때 도움을 많이 받았다. 또 하나는 스팸 전화와 마지막으로는 이와쨩. 나머지 메시지들은 이와쨩과 맛층, 맛키와의 단체대화방.

- 야, 오이카와 웬일로 술 먹으러 안 나온다 했더니 아프대매?
- 감기랰ㅋㅋㅋㅋ
- 바보는 감기 안 걸리는거 아니였냨ㅋㅋㅋㅋ
- 미친ㅋㅋㅋㅋ낼 막 행성충돌, 지구멸망 이런 거 아냐?ㅋㅋㅋㅋㅋㅋㅋㅋ

웃겨 죽겠다는 의미의 이모티콘이 잔뜩 붙어있는 건 덤이었다. 참 종류가 많기도 해라. 맛층, 맛키 너무하다, 진짜. 천하의 오이카와 씨가 아파서 혼자 방에서 죽어가는데 저것들은 친구라는 게 바리바리 싸 들고 병문안을 오지는 못할망정.

- 야, 괜찮냐? 바보카와 주제에 왜 안 걸리던 감기에 걸리고 지랄이야.

단체방이 아닌 1대1 대화방에 이와쨩이 보낸 메시지였다. 말투는 험악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걱정하는 마음에 조금 감동 받았다. 역시 날 이해해주는 건 이와쨩 밖에 없다.

- 너 집에 약이랑 먹을 건 있냐? 없으면 내가 뭐 사가리?

요 며칠 조별과제랑 기말 때문에 거의 학교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집에 먹을 게 별로 없는 건 사실이었다. 어제 겨우 발표와 기말을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온 뒤, 긴장이 풀렸는지 밤부터 갑자기 열이 올랐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찬장을 열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진통제를 먹고 잤는데, 밤새 끙끙 앓고 아침까지도 열이 내려가지를 않아, 결국 오늘 학교를 못 갔다. 뭐 중요한 일은 아니고, 애들이랑 뒤풀이였다. 간만에 부어라 마셔라 하고 싶었는데 그걸 못한 건 좀 아쉬웠다.

더 나빠지게 전에 약은 먹어야겠기에 찬장과 냉장고를 뒤적여봤지만, 그저께 야식으로 마지막 남은 컵라면을 먹어버린 게 생각났다. 결국 냉동실에 덜렁 남아있던, 2주 전인가에 먹고 마지막으로 남았던 말라비틀어진 식빵 한 장을 먹고 약을 먹은 뒤 다시 기절한 게 오늘 늦은 오전쯤이었다.

현재 시각 17:12.

꼬박 6시간을 잤더니 아침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살 만했다. 아직 열은 있는 것 같지만 뭐 이 정도야.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찌뿌둥한 몸을 풀고 무릎도 가볍게 마사지를 해줬다. 몸 컨디션에 비해 다행히 상태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한숨 돌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와쨩의 메시지가 온 게 16:08. 오이카와 씨, 혼자 쓸쓸한데 와달라고 해주면 와줄까. 아픈 건 오랜만이라 어리광부리면 와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보고 있던 휴대폰을 다시 탁자에 내려놓는데, 닫아놓은 문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아님 도둑? 이 조그만 집구석에서 가져갈 게 뭐가 있다고. 발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 문에 귀를 대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꼭 부엌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도둑이 부엌에서 요리를 할 리는 없겠고. 설마, 불쌍한 오이카와 씨를 위해 이와쨩이 와준 걸까? 자신의 집의 현관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 분명 츤데레 이와쨩이 와준 게 틀림없었다.

"우왕 이와쨩! 오이카와 씨를 위해 와준 거,"

틀림 없어야 했다.

"일어났나."

기세 좋게 문을 열고 튀어나온 나의 한껏 높인 목소리를 들어야 할 존재는 네가 아니어야 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우리 집 부엌의 가스레인지 앞에서 냄비를 휘젓고 있는 존재는 네가 아니어야 했다.

"죽을 끓이고 있다."

헤어지고 6개월이 지났다. 반년이란 시간 동안 연락 하나 없다가, 이제 와서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 있는 건데?

"여긴 어떻게 알았어?"
"학교에 찾아갔더니 없어서 의상과 사람에게 물어보니 알려주던데."
"문은 어떻게 열었어."
"똑같던데."

내가 들어오는 걸 원치 않았다면 비밀번호를 바꿨어야지.

말로 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의기양양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봐서는 딱 저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뻔했다. 그냥 1년 반 동안 익숙해진 번호니까, 새로운 번호를 설정하고 외우기 귀찮아서 이사 온 집에서도 똑같은 비밀번호로 했다는 것은, 지나가던 동네 개가 비웃을 가치도 없다고 무시할 정도로 참 부실한 자기변명이었다. 솔직히, 우시지마가 자신의 집에 오는 걸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연애드라마처럼 감동의 재회를 꿈꾸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입 밖으로도 꺼내지 않았던 유치한 상상이었지 이렇게 실현될 리 없는, 실현되길 바랐던 상상이 아니었다. 거기다 완벽하게 세팅하고 옷도 차려입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 당당히 앉아있는 최상의 오이카와 씨가 아닌, 아파서 자느라 퉁퉁 부은 얼굴과 눌리고 떡진 머리에 늘어진 잠옷을 입고, 반 쓰레기장 화 되어있는 작은 맨션에 멍청하게 서 있는 오이카와 씨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

"앉아있어라. 조금 뒤면 완성되니."

산만한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팔랑이는 민트색 앞치마를 입고 국자로 냄비를 젓고 있는 뒷모습이 참 웃겼다. 처음 동거를 시작했을 때 요리는커녕 달걀프라이를 한답시고 프라이팬을 태우고 식빵을 정체불명의 검은 숯덩이로 만들었던 그때와 비교하면 많은 발전이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옆에 붙어서 간단한 요리를 가르친 자신이었다. 의외로 요리에 흥미가 있던 건지 한번 기본을 알려주자 요리실력이 일취월장해버린 건 조금 분했지만. 재능이 있는 녀석은 다른 걸 해도 잘하는 거냐. 라고 혼자 속으로 투덜거렸던 게 기억난다.

"...젠장."

꾹꾹 억지로 누르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갑자기 튀어나온 작은 기억에 확 터져 튀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른 작은 조각들이 부딪혀오고 긁고 떨어지면서 생채기들을 만들어낸다.

간만에 몰아쳐 오는 감정들이 버거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하니 남자의 등을 보고 있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린 우시지마가 이쪽을 본 뒤 작게 한숨을 쉬고 자신에게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을 쳤지만 그가 이미 잡아챈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억지로 식탁 앞에 앉혀졌다.

확실히 식탁에 앉은 것을 확인한 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몇 초도 안되는 짧은 찰나 동안 닿았다 다시 사라진 온기가 밉고 야속했다. 고개를 숙이자 떨리고 있는 오른손이 보였다. 제길. 이게 뭐라고 떨어. 떨리고 있는 것은 손 뿐만이 아니었지만, 애써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무시하며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아 눌렀다. 맥박이 미친 듯이 빨랐다.

달그락-.

손목을 붙잡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눈앞에 그릇이 놓여졌다. 하얀 죽 위에 얹힌 빨간 우메보시가 왠지 웃겼다. 이왕이면 후리카케로 해주지.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우시지마의 시선과 마주쳤다. 왜 안 먹냐는 눈빛이다.

“...우메보시...”

없었을 텐데.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더군.”

그러니 사 왔다는 말이겠지. 우메보시는커녕 쌀도 떨어진 지 오래라 냉장고에 있는 건 맥주 정도였으니 아마 쌀부터 사온 듯싶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번은 들락날락 했다는 건데, 도대체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감도 안 잡혔다. 아무리 아파서 정신을 놓고 있었다고 해도 타인이 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던 몇시간 전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죽그릇이 보였다. 아무 말 없이 위로 올라가다가 점점 퍼지며 사라지는 기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 내 감정도, 이 상황도 저 김처럼 공기 중에 퍼져서 사라지면 좋을 텐데.

“많이 아픈가?”

음식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있는 내가 아파서 못 먹는 거라고 생각한 건지 무뚝뚝한 목소리에 걱정이 배어 있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반대편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죽그릇 위로 그늘이 생겼다. 무슨 일인지 파악할 틈도 없이 빠르게 다가온 이마에 닿은 온기를 반사적으로 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읏...”

튕기듯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인 탓에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지만 신경 쓰지 않고 뒷걸음을 치며 거리를 만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인지, 나에게 맞은 왼손을 내리지도 않은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우시지마를 노려보자 그가 작게 한숨을 쉬며 허리를 폈다.

“놀라게 한 건 사과하지.”

그러니 식기 전에 먹지. 라고 차분하게 덧붙이며 다시 자리에 앉는 우시지마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왜. 나도 모르는 새에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떨리는 것을 애써 숨기며 입을 열었다.

“우시지마 씨.”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른 적 없는 호칭에 나를 향해있던 남자의 시선이 차갑게 굳었다.

“여긴 왜 왔어?”

우린 더 이상 팀메이트도 아니고, 룸메이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사이인데.

작년 국내경기에서 뛰다가, 아슬아슬하게 버텨줬던 무릎이 기어코 망가졌다. 시합 도중에 쓰러진 뒤, 병원에서 눈을 뜨고 마주하게 된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재활을 해도 다리를 절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잘해야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라는 것. 또한, 앞으로 배구는 물론이고 다리를 격하게 움직여야 하는 운동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 말을 듣고 네, 알겠습니다. 라며 포기할 오이카와 씨가 아니었다. 기적이란 말, 괜히 있는 거 아니잖아. 한 번쯤은 나에게도 그 기적이란 걸 내려줄 수 있는 거 아냐, 신님? 분노와 오기와 실낱같은 희망을 끌어안고 다른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꼬박 6개월을 재활에만 매달렸다.

- 재활결과가 아주 좋아요! 여기까지 회복되는 건 참 드문 일인데, 오이카와 씨가 열심히 노력하신 덕분이에요!!

담당 의사의 흥분한 목소리도, 옆에서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간호사의 얼굴도 들어오지 않았다. 한 번쯤은 역경을 딛고 일어나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상상했던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재활결과가 좋다고 해도 일상생활에서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미친 듯이 재활에만 전념한 덕분에 결과적으로 다리는 절지 않게 되었다. 거기다 짧은 시간이라면 가볍게 조깅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배구선수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신은 기적을 선사해줬지만, 전부는 주기 싫었는지 오이카와 토오루가 원하던 기적의 반만을 내려줬다.

기본적으로 배구를 비롯한 운동선수로서의 삶은 짧았다. 거기다 어릴 때부터 시작한 운동이기에 더더욱 혹사당한 몸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걱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선수로서 코트에 설 수 있는 날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언젠가는 코트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은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몇 년은 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되기 전에 그래도 한번은 JPN 마크를 달고 세계대회의 코트에서 뛰어다니며 메달까지 가져왔으니 조금은 덜 억울하려나.

그렇게 애써 자위하려 해도 싫은 건 싫었다. 인생의 반 이상을 차지했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은퇴 후 스포츠 쪽에서 몸을 담으며, 만일 스포츠계를 떠난다고 해도 동네 팀이던 어디던 취미로라도 공을 올리고 공을 때리고 코트 위를 달리고 있을 줄 알았다.

재활하시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웃으며 배웅해주는 간호사와 물리치료사에게 웃으며 감사했다고 인사를 한 뒤 바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짐을 쌌다. 1년 반을 살았는데 큰 캐리어 두 개를 다 채우지 못하는 짐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집에서 살면서 필요한 것은 다 갖춰져 있었기에 더 그랬다. 그만큼 놓고 가는 것이 많다는 거겠지. 「둘」을 위한 물건들은 더는 제게 필요하지 않으니.

헤어지자. 라는 짧은 문장을 굴러다니던 종이에 휘갈겨 쓴 뒤 식탁에 올려놓고 나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2년을 사귀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 성의 없고 예의 없는 통보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것도 버거웠다. 어차피 배구를 하지 못하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정확히 말하면 우시지마에게 토스를 올릴 수 없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을 테니, 성의 없는 통보가 미안하긴 했지만 내 행동에 대한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짐을 들고 무작정 이와쨩의 자취방에 가서 그대로 미야기에 내려갈까, 아니면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사라질까 고민하던 차에 어쩌다 보니 패션 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인생의 반 이상을 차지했던 배구를 빼앗긴 것은 오이카와 토오루를 이루고 있던 것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텅 비어버린 마음을 채워주는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이 고마웠다. 아무리 마음이 추워도 패션계라는 생소한 환경과 배구를 모르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신선했으며, 일단은 국가대표까지 했지만 부상으로 은퇴한 비운의 배구선수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던 사람들의 배려와 태도도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사라져, 학기가 끝날 즈음엔 주위 사람들도 자신을 단순한 클래스메이트로 대해주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수업에 실습에 정신없이 살다 보니, 집에 들어오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고 덕분에 한 학기 동안 잡생각 없이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우시지마에게서의 연락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멋대로 쪽지 하나 달랑 남기고 나온 나였지만, 내가 보기에도 오이카와 토오루란 인간은 꽤나 제멋대로인 녀석이기에 초반에는 우시지마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2년을 사귀었는데 이유도 모른 채 헤어지잔 말에 간단히 납득할 남자일까. 하지만 짐을 싸서 같이 살던 맨션을 나온 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휴대폰에 우시지마의 이름이 뜨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와쨩이 사다 준 우유빵 포장을 뜯으며 틀어놓았던 TV에서, 모르는 세터가 올리는 공을 시원하게 치는 우시지마의 모습을 보며 납득했다.

아-역시 우시지마에게 오이카와 토오루의 존재 의미는 그가 치기 좋은 토스를 올려주는 세터였을 때만 있던 거구나.

부드러운 우유빵을 마치 질긴 고기를 뜯는 것처럼 거칠게 뜯으며 나는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우시지마의 연락처와 메시지, 사진을, 우시지마를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웠다. 그리고 그 뒤로 지금 눈앞에 무표정한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서 있는 이 순간까지 반년이 지났다.

“우시지마 씨랑 나는 이제,"

내가 널 잊으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아무런 사이도 아니잖아.”

얼마나 많이 아팠는데.

이제야 겨우겨우 상처가 아물어가려고 하는데, 네가 뭐라고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나도 무서워서 못 만지는 상처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다시 헤집어 놓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 오이카와 씨는 이제 더 이상 너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하고 싶어 한껏 양 입술을 끌어올렸지만, 그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온몸을 덜덜 떨며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을 바라보는 우시지마는 여전히 내가 읽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헤어진다고 동의한 적 없는데."

그리고 돌아온 말에 순간 잘못들은 줄 알았다. 얘 지금 뭐라고 그런 거야?

"하아? 내가 쓴 메모 못 봤어?"
"봤다."
"그 뒤로 연락 하나 없었잖아. 그 말은 동의한다는 거 아니야?"

황당함에 빠르게 내뱉는 내 말에 우시지마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내가 연락하거나 찾아왔다면 넌 지금쯤 도쿄가 아닌 홋카이도나 오키나와에 있겠지. 그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여기에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까."

소 새끼 말하는 거 보게. 그래, 말하는 것도 새삼스럽지만 오이카와 토오루는 하찮은 자존심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 아, 우시지마와 2년 동안 사귀면서 그 자존심도 다 깎이고 뭉개졌으니, 이것도 옛말인가. 어쨌든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인간이 자존심 빼면 시체라는 사실을 제일 잘 알면서도 나 좋다고 고백해온 놈이 바로 눈앞에 있는 소 새끼. 언제는 좋다고 따라다닌 게 누구인데 이제 와서 저따위로 말하는지.

"일부러 안 했다는 거야?"
"너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연락하지 않았다."
"우와~눈치 없는 우시지마 씨 주제에 배려해준 거야? 아이고 고마워라. 배려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할까?"

잔뜩 빈정거리는 내 말에 우시지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내 다시 무표정으로 변했다.

"시간이고 나발이고, 이제 와서 이런 얘기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달라질 것도 없는데. 난 이제 다 정리했어. 우시지마 씨랑도 그때 끝난 거고."

어차피 우시지마 씨에게 공을 올려주지 못하는 세터는 이제 필요 없잖아?

내 말 맞지? 라는 의미를 담은 과장된 몸짓으로 가볍게 덧붙였다. 그리고 최대한 가볍게 포장한 무거운 내 진심에, 무심한 듯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우시지마의 무표정이 무너졌다. 새삼스럽게, 뭐가 저렇게 충격이라고.

"하,"

귓가로 기가 막힌다는 헛웃음이 들려왔다. 중학생 때부터 알아왔고 2년을 사귄 팀메이트이자 옛 연인으로서, 저런 반응은 참 생소했다. 격해진 감정이 더는 날뛰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게 신기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잠시 멈칫한 사이에 일그러진 표정의 우시지마가 거리를 좁혀왔다.

다가오는 그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치는 내 손을, 우지시마가 잡아채어 거칠게 잡아당기자 속절없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반항할 틈도 없이 몸이 밀착되었다. 가까워진 시선을 마주하기 힘들어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대로 턱을 잡혀 움직임을 빼앗겼다.

“고작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나?"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잔뜩 긁혀있었다. 마치 성난 짐승의 눈빛을 하고 이를 갈면서 으르렁거렸다.

"내 안의 네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나한테서 도망친 거라고?"

"...이것 좀 놔줄래, 우시지마 씨? 아파."

붙잡힌 턱이 아파 올라오는 짜증을 굳이 숨기지 않은 채 말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불을 붙인 것인지 턱을 쥐고 있는 힘이 강해졌다. 억지로 마주한 눈동자가 사납게 흔들리고 있었다.

"씨발. 제발 그 우시지마 씨 소리 집어치워."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들려오는 헛소리에 온 힘을 다해 우시지마의 손을 떼어냈다. 안 그래도 먹은 거 없어서 힘없는데 환자 상대로 힘쓰게 하지 말라고, 바보 새끼야.

"하, 옛날부터 「우시와카」 싫다고 그만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제대로 불러줬는데 왜 또 지랄이야."

온갖 짜증을 담아 우시지마를 노려봤지만 눈치 제로인 놈에게는 통하지 않는지 재차 손을 뻗어와 내 팔을 그대로 끌어당겼다. 버틸 새도 없이 몸이 확 끌려가서 그에게 안겼다. 방어할 틈도 없이 무방비하게 흘러들어오는 그의 체취에 멍해지려는 정신을 다잡고 그를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온몸을 엮고 있는 팔은 단단해졌다.

"..읏...갑자기 무슨 짓이야! 이거 안 ㄴ.."
"토오루."

그리고 사고가 정지했다.

"토오루."

잘못 들었나 했지만 다시 한번 머리 위로 들려온 목소리에, 남자를 때려서라도 벗어나려고 들어 올렸던 팔이 힘을 잃고 그대로 떨어졌다.

"제발."

사귈 때도 거의 불린 적 없는 이름이었다. 평소에 내가 듣고 싶다고 징징대고 졸라대면 한번 불러줄까 말까 했던 이름이었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뜨겁게 서로를 찾을 때도 듣기 힘들었던 세 음절이었다. 치사한 새끼. 왜 저걸 지금, 이 순간 말하는 건데. 왜 저렇게 필사적인 목소리로 입에 담는 건데.

"내 이름 부르지 마!!! 이거 놔!! 놓으라고, 새끼야!!"

소리를 지르며 발악하는데도 나를 붙잡고 있는 힘은 줄어들지 않았다. 한참을 욕을 하고 버둥거리다가 제풀에 지쳐 무너지자 함께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우시지마는 나를 놓지 않았다. 이미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었다. 하도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쳐서 그런지 목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한바탕 난리를 친 뒤 남은 것은 일정하게 들려오는 벽시계 초침의 소리와 끅끅거리는 내 목소리뿐이었다. 여전히 나를 안고 있는 팔에서 벗어날 힘도 없어, 포기한 채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분비물로 잔뜩 젖은 어깨에 기대 새액새액 밭은 숨만 내뱉고 있는 내 등을, 큰 손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에겐 「오이카와 토오루」로 충분하다.”

그에게서 이런 목소리를 듣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가 상냥했다.

“...나 이제, 우시와카쨩, 한테 토스, 못 올려주는데...?”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건 「오이카와 토오루」니까.”

여전히 우시지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말을 용케도 알아듣고 곧바로 대답해온다.

“너의 모든 것을 원해.”

처음 고백받았을 때와 같은 말. 달라진 것은 현역 배구선수인 그와 부상으로 은퇴한 비운의 배구선수인 나의 입장 차이.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감정 뿐.

“...너한테, 와카쨩한테 모든 걸 줘버리면 난 어떻게 하라고...나에게 남는 게 뭔데...”

우시지마가 고백을 했던 이유인 오이카와 토오루의 배구는 이제 없다,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남은 건 고장난 몸뚱아리와 하찮은 자존심, 이 둘 뿐인데 이걸 너에게 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는 어떻게 하라고.

“내가 있지 않나.”

넌 날 가지면 돼. 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냥 나와 함께하는 거, 그걸로는 안 되겠나?”

재활을 하면서,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었던 우시지마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었다. 변함없이 곁에 있어 준 그가 고마우면서도 불안함과 괴로움, 자신은 하지 못하는 배구를 계속하는 우시지마에 대한 미움이 고마움보다 커져서, 그에게 이유 없이 화풀이를 하고 물건을 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연인으로서 순수하게 기뻐하고 싶었지만, 나 혼자 제자리에 서 있는데 그는 자신에게 멀어지는 그 느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일 참을 수 없던 것은, 우시지마가 미우면서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나 자신이었다.

“...나 아직도 배구, 잘 못 봐.”
“그래.”
“아직은, 너 배구 하는 거 보는 것도 싫어.”
“그래.”
“같이 있으면, 또 막 화풀이하고 짜증 낼 거라고.”

이런 모순되고 질척한 감정은 내가 사랑한 우시지마와 그의 배구를 망칠 것이라는 걸, 그리고 또한 나 자신을 부숴버릴 것을 알고 있기에 떠난 건데,

“그래도 너랑 같이 있으라고?”
“그래.”

기대하고 만다.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닌 그냥 「오이카와 토오루」도 그와 함께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우시와카 쨩, 내거라고?”
“그래.”

믿고 싶어진다. 천재 배구선수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일반인 「오이카와 토오루」와 함께하고 싶다는 말을.

망설이고 있는 나를 느꼈는지, 우시지마가 여전히 끌어안고 있던 몸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내 얼굴을 감싸 안아 눈을 맞춰왔다.

내가 널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너도 날 떠나지 못해.

이렇게 말해오는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 강렬함을, 그 오만함을 당연하다는 듯 표출하고 있는 이 남자가 얄미웠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우시지마의 크고 따뜻한 손에서 얼굴을 떼어내자, 그가 순순히 나를 놓아줬다. 눈물, 콧물, 침으로 엉망일 것이 분명한 얼굴을 양손으로 거칠게 비비자, 그 모습을 보던 우시지마가 드물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웃지마. 소리 질렀더니 목 아파. 물.”
“알았다.”

페트병 채로 가져다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갈증과 함께 답답함이 조금 가신 느낌이었다. 주저앉아 있는 채로 서 있는 우시지마에게 손을 뻗자, 아이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대로 이끌려 식탁 앞에 다시 앉자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는 죽이 눈에 들어왔다. 그새 식었는지 더 이상 김은 올라오지 않았다.

“다시 데워오지.”
“아니, 이대로가 좋아.”

죽그릇을 가져가려고 하는 우시지마의 손을 잡아 만류하자, 별말 없이 맞은편 의자에 몸을 내렸다. 수저를 들고 죽을 퍼서 입에 넣었다. 별거 없는 평범한 맛인데도 맛있었다.

“맛있어.”
“다행이군.”

이 관계가 어떻게 될지, 토스를 올리지 못하는 오이카와 토오루로도 충분하다는 우시지마의 말을 믿어도 될지, 사실 잘 모르겠다.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 나는 또 우시지마에게 상처를 줄 것이고, 우시지마에게 상처를 받을 일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믿어보고 싶어진다.

“근데 나 후리카케 파니까 다음엔 우메보시 말고 후리카케로 해줘.”

배구선수 오이카와 토오루의 연애는 끝났지만,

“기억해두지.”

오이카와 토오루의 연애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February 2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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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하이큐 글입니다!
워낙 하이큐가 메이저 장르라 프로소비러로서도 충분히 덕질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보고 싶은 내용은 자기가 쓰게 되네요^_ㅜ

처음으로 쓰는 하이큐글이 우시오이인 것도 놀라웠지만, 내용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쓰면서도 놀랐습니다. (사실 최유기 때부터 지금까지 쓴 글 중에 가장 분량이 길...;) 단순히 [우시지마와 오이카와가 헤어졌는데, 한참 뒤에 우시지마가 아픈 오이카와 집에 나타나서 요리하니까, 그걸 보고 화내는 오이카와]가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말이죠...;

1인칭 시점으로 글 쓰는 것도 생각해보니 거의 처음이라 우왕좌왕했지만, 익숙지 않은 만큼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즐겁게 쓴 글입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만약 언젠가 [side U]가 나오게 된다면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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