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Note

Story Note를 이용하시기 전에 게시판의 공지사항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HQ][소품] 둘. 하나. 둘. (오이스가)

하이큐
소품
작성자
휘엔
작성일
2017-03-06 14:13
조회
937
[소품] 둘. 하나. 둘
written by 휘엔

- 원작 기반 미래 AU
-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중간에 동의없는 관계의 묘사가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돈마이-!”
“하나 더!”

하아, 하아.

동료들이 격려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가 참 멀었다. 귓가를 덮고 있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 때문이었다. 벌써 몇 번째의 서브미스일까. 다행히 아직 점수는 앞서고 있었지만 여유를 부릴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집중하자.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며 발돋움을 했고 이번엔 잘 들어갔다. 다행이었다. 이것보다 더 꼴사나운 모습을 그에게 보일 순 없었다. 그가 과연 이 경기를 보고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삐이익-!

날카로운 휘슬소리와 함께 경기가 끝났다. 아슬아슬했지만 승리였다. 고생했어. 잘했어. 라고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가 건네준 타올을 받아 흐르는 땀을 닦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기장을 둘러봤지만 찾는 사람은 없었다.

“어이, 오이카와. 너 괜찮냐?”

등을 툭 치는 이를 보니 쿠로오였다.

“왜 이렇게 상태 안 좋아?”

가볍게 말해왔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요즘 상태가 안 좋긴 했지. 계속되는 실수와 신경이 곤두선 모습에 감독도 팀원들도 불안해하는 걸 알았지만 좀처럼 조절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이니 다른 때 같으면 얄짤없이 벤치를 지키고 있었겠지만, 얼마 전 경기에서 다른 세터가 부상을 입었기에 경기에 나갈 수 있는 세터가 자신밖에 없었다. 상대 팀이 딱히 강한 팀이 아니었기에 안일하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고전할 줄은.

“미안, 쿠로쨩. 힘들었지?”

쿠로오에게도 다른 팀원들에게도 경기를 보러 와준 팬들에게도 미안했다.

“무슨 일 있어? 요즘 진짜 너답지 않다.”

그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실없이 웃고만 있자, 눈치 빠른 녀석이 뭔진 모르겠지만 얼른 해결하라며 등을 팡 친다.

“쿠로쨩, 아프잖아!”

억울하다며 외친 내 목소리에 쿠로오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힘들긴 했는지 감정이 실려있던 한방에, 아프다며 투덜거렸지만 속으로는 죄책감이 강해졌다. 감독과 팀원들에게 미안함을 담아 사과하자, 한동안은 시합 없으니 좀 쉬고 정신 차리고 오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돌아왔다. 정신 차리고 오겠다며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피곤했지만 집으로 가기 싫었다. 그곳엔 네가 없으니까.

이와쨩네 갈까. 연락해볼까 하고 들었던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얼마 전에 내가 저지른 짓 때문에 호되게 혼이 난 뒤 해결되기 전까지는 연락하지 말라는 통보까지 들었던 차였다. 전화해서 징징거리면 툴툴거려도 받아주기야 하겠지만, 안 그래도 일 때문에 바쁜 소꿉친구를 내 일로 더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하아—”

길게 숨을 내뱉어봤지만, 날씨가 따뜻해져서 그런지 입김이 하얗게 되는 일은 없었다. 그가 떠나고 2주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단 14일 동안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고 있는데 난 그저 제자리에 서서 맴돌 뿐이다. 넌 지금쯤 어쩌고 있을까.

집 근처의 작은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맥주 몇 캔을 사서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의 불이 꺼져있는 게 싫었지만 어쩔 수 있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싸늘한 냉기가 날 맞아주었다. 적당히 옷을 벗어 던진 뒤, 식탁에 비닐봉지를 올려놓고 가만히 어두운 집 안을 둘러보았다. 왜 난 이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걸까. 너와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식탁 한쪽에 놓여있는 사진의 그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미소를 띠운 채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는 어땠더라.

타교에서 배구를 하는, 3학년인데 1학년인 토비오쨩에 주전을 뺏긴 비운의 세터. 첫인상은 그 정도였다. 아, 맞다. 소리 내어 웃던 맑은 목소리와 휘어진 눈 옆의 작은 눈물점도 묘하게 신경 쓰였었지. 그 모습이 운동부의 남고생답지 않아서 ‘상쾌군‘이라고 멋대로 별명을 붙여서 부르곤 했다. 물론 나중에는 상쾌군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상쾌군이라고 불러댔고, 가끔 그의 손이 내 등으로 날아왔다. 자신보다 작은 손이었지만 역시 운동부여서 그런지 제법 매웠다.

경기장에서 가끔 만나서 눈인사만 건네는 정도였던 그를 다시 만난 건 의외로 도쿄의 전철이었다. 스포츠 추천으로 도쿄에 진학한 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그 날은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푹푹 찌는 한여름의 온도와 습기의 더블공격으로 인해 불쾌지수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런 날의 퇴근 시간의 만원 전철은 불쾌함과 짜증의 완벽한 싱크로 공격이었다.

퇴근 시간의 인파에 떠밀려 겨우겨우 전철 안에 탑승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불쾌지수는 더더욱 올라갔다. 그나마 일본인 평균보다 큰 신장으로 인해 남들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구원이었을까. 괜히 오늘따라 천천히 가는 듯한 전철을 원망하며 인파에 꽉 끼인 상태로 눈만 도로록 굴리고 있으려니, 바로 근처에서 왠지 모르게 익숙한 머리통이 시야에 들어왔다.

- ...카라스노의 상쾌군?!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조용하던 전철 칸에 울려 퍼지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익숙한 머리통이 위로 젖혀져 갈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맞았다.

- ...세이죠 주장군?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청춘의 단 몇 시간을 공유했을 뿐인데 지친 타향살이에 고향 사람을 만나 반가웠던 걸까.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반가움으로 바뀌며 반짝거렸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시선을 교환한 뒤 다음 역에서 나란히 내렸다.

- 상쾌군은 뭐야, 도대체?
- 그러는 상쾌군이야말로. 세이죠 주장군이라니, 심한 거 아냐?
- 누가 할 소린데.

푸하하-. 통쾌하게 웃던 맑은 목소리에 머릿속을 지배하던 불쾌함과 짜증이 단박에 날아갔다. 그리고 그 대신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회색의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 그 옆의 눈물점. 그것이 시작이었다.

도쿄로 진학한 그의 학교는 자신의 학교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자취하고 있는 지역도 비슷했다. 가끔 전화를 하고, 근처에서 만나서 한잔하기도 하고, 짜증 나는 일이 있었다며 지옥의 매운맛으로 유명한 탄탄멘집에 억지로 끌려갔다가 속이 뒤집힌 일도 있었고, 처음으로 그가 경기를 보러 와준 날, 처참하게 져버린 날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나를 끌고 나가 함께 도쿄의 우유빵 맛집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다.

각자의 자취방에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함께 술을 진탕 마시고 집에 가던 길에 처음으로 손깍지를 끼고, 처음으로 온전히 서로의 체온만을 느끼게 되었던 모든 일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지만, 그만큼 서로에게 조심스러웠고 서로가 소중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나는 프로에 입단했고 그는 무난하게 취직을 했다. 그때까지도 거의 반 동거 상태였지만, 그의 취직처가 결정되자마자 그의 회사가 가까운 쪽에 집을 찾아 이사를 했다.

- 뭐라고 해야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쑥스러운 듯 웃는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문도 안 닫힌 현관에서 그의 얼굴을 붙잡고 뽀뽀했다가 등짝을 맞기도했더랬다.

그렇게 서로가 좋았는데. 함께 소소한 것에 웃고 울며 행복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 토오루. 그 사람은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그냥 내가 회식 때 부장님 상대하다가 과음해서 집까지 부축해서 데려다준 것뿐이야.
- 나한테 전화하라니까.
- 어떻게 그래. 너 훈련 끝나서 피곤할 텐데. 그리고 국가대표 선수가 밤 늦게 동거인 친구 데리러 오는 것도 이상하잖아.

언제부터인가 불안했다. 함께 있는데도 불안했다. 고등학교도 달랐고 대학교도 달랐고 현재 직장도 다르니, 생활패턴과 사귀는 인간관계가 다른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고 또한 익숙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른 사람과 있는 그의 모습이, 다른 사람과 폰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웃고 화내는 그 모습이 보기 싫었다. 나만 봐. 나랑만 있어. 가지마. 추악한 감정이 하루에도 백만 번씩 오갔다. 나에게도 그가 모르는 나만의 인간관계가 있는 주제에 이기적인 외침이라는 건 알았다. 내가 사랑하는 그를 이루고 있는 요소에 평범한 일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그에게서 빼앗고 싶어지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 ...꼭 가야 해?
- 저번부터 얘기했잖아. 정말 오랜만에 배구부 전원이 모이는 날이라 이번엔 꼭 가야 한다고.

요즘은 다이치네도 못 봤고 1학년들도 계속 못 봤단 말이야. 삐죽 입을 내밀며 덧붙이는 말에 불만이 서려 있었다. 배구부 3년생들이니까 그나마 가끔 만났던 거지, 어느 순간부터 그 외의 인간관계가 적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의 눈동자에서 반짝임이 사라져갔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의 모습이 사라져가는데도 그가 오로지 내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나는 무언가 잘못된 인간이겠지.

- 나도 갈까?

카라스노 배구부 모임에 세이죠 주장이 간다고? 우리 2학년들이 가만 안 있을 텐데?

거기다 그의 인간관계 중 계속 연락하고 있는 사와무라와 아즈마네 이외에 우리 사이를 아는 이는 없었다. 나로서는 그와의 관계가 밝혀져도 괜찮았지만, 아니 오히려 밝혔으면 했지만 내가 대중에게 꽤 인지도가 높은 스포츠선수이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모두 나를 위한 것이었다. 일 이외에 만남을 최소한으로 줄인 것도 불안해하는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 오늘은 조금 늦을 수도 있지만, 그 대신 술 많이 안 마실 테니까 얌전히 집에서 쉬고 있어야 해?

그러니 웃으며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현관문을 여는 그의 팔을 붙잡으면 안 되는 거였다.

- 토, 토오루? 뭐하는...잠깐, 잠깐만...!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찢긴 그의 셔츠와 옷가지들이 처참하게 방바닥에 널려있었고, 그도 나도 엉망진창이었다.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하고 싶었는데.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계속 함께하고 싶었는데.

기억이 없다고 해도 내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이불로 몸을 감싸고 돌아누워 있는 그에게 차마 손을 뻗을 수가 없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결국, 나란 놈은 이렇게나 추악한 놈이었다. 이런 주제에 누가 누굴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손바닥은 이미 눈물투성이였다. 언제부터인가 흘러나오고 있던 오열을 삼키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멍청한 신체는 내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삐걱.

침대가 느리게 출렁였다. 뒤를 돌아보지도, 일어나 방을 나가지도 못한 채 덜덜 떨고 있는 내 뒤로 매트리스가 가라앉았다. 뒤에서 뻗어져 온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등으로 그의 체온이 살며시 달라붙어왔다. 손목에 붉게 남아있는 자국을 아연히 보고 있는 나를 하얀 팔이 그대로 감싸 안고, 가만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행동이 꼭 나에게 울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결국 그 손을 붙잡고 울어버렸다. 너는 그 상황에서도 나에게 상냥했다. 내가 이미 오래전에 그 상냥함을 받을 자격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길에 아이처럼 엉엉 울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그는 이미 없었다. 그와 함께 그가 매일 쓰는 물건들과 옷가지, 작은 캐리어가 사라져 있었다. 메모도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남은 것은 어제는 없었던 식탁 위의 우유빵 뿐이었다.

그 뒤로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사라져버린 그를 차마 찾을 수가 없었다. 연락을 하려고 온종일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했지만, 메시지도 전화도 하지 못했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사와무라나 아즈마네의 집으로 갔겠지. 회사에서 쓰는 물건들을 챙겨갔으니 회사로 가도 만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 사이에 사와무라에게 무슨 일 있냐며 메시지가 왔다. 아마 그는 사와무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연락하지 말라고 그랬겠지만, 책임감 강한 카라스노의 주장이 친우의 말만 듣고 가만히 있진 않겠지. 사와무라의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갔고, 그 사이에 사와무라에게 걸려오던 전화도 오지 않게 되었다. 그 뒤, 내 상태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이와쨩에게 추궁을 당한 끝에 대충 상황 설명을 하자 한대 얻어맞은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딸깍, 하고 미지근해진 맥주를 땄다. 편의점 도시락은 먹다가 영 입맛이 없어서 반도 못 먹은 채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버려버렸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어떻게 이 일을 바로잡아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던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도 모르는데? 사과는 또 어떻게 하고. 엎드려서 빌면 될까? 만일 그가 사과를 받아줘서 돌아온다고 해도, 내가 또 정신이 나가서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지? 나도 나 자신을 못 믿겠는데 그에게 날 믿어달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복잡하게 뇌를 돌아다니는 수많은 질문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마지막으로 남은 액체를 털어 넣고 바로 다음 캔을 열었다. 집 안의 공기가 무겁게 자신을 누르는 느낌이 참기 힘들었다. 술이라도 취했으면 좋겠는데 취기는 아직 오려면 한참 남은 듯싶었다.

드르륵.

맥주캔을 한 손에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식탁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무겁던 정적을 깼다. 그대도 거실을 지나 베란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들자 오늘따라 하늘이 참 맑았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맥주캔을 놓으려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늦은 밤의 조용한 주택가다보니 내려다본 거리도 조용했다. 그 고요함이 왠지 씁쓸해서 고개를 돌리려던 그 순간, 익숙한 향이 코를 찔러왔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멘솔 향.

다시 아래로 시선을 향해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자, 가로등이 고장 나 어두운 골목에서 빨갛게 타들어 가는 작은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허겁지겁 들고 있던 맥주캔을 내던지다시피 하며 휴대폰을 확인하자 짧은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집 앞이야.]

다른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도 없어서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한밤중에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이웃을 배려할 여유는 없었다.

“하악, 하악.”

현역 운동선수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고작 계단을 내려왔을 뿐인데, 마치 풀 세트를 뛴 것처럼 호흡 조절이 되지 않았다.

“...천천히 내려와도 됐는데.”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그가 작게 웃으며 피우던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껐다. 대학생 때 시작한 담배를 나와 사귀기 시작한 뒤로 완전히 끊었던 그였다. 토오루랑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려면 이제부터라도 금연해야지~ 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던 그였지만, 사실은 비흡연자이자 운동선수인 나에게 간접흡연을 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금연을 결심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 걸을까.”

언제부터 여기에 서 있던 건지 재떨이가 담배꽁초로 가득했다. 정리한 재떨이를 품에 넣고 그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옆에 나란히 설 용기가 나지 않아 조금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오늘 시합 봤어.”

조용한 거리를 한참 걷던 그가 마치 예전처럼, 가볍게 툭 던진 말에 땅만 보고 걷던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는 걸음을 멈춘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형편없더라.”

가차 없이 말해오는 내용과는 달리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얼굴 꼴은 또 그게 뭐야. 명색이 운동선순데 몸 관리는 해야 할 거 아냐.”

그러는 코우쨩은.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만 벙긋거린 채 목구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상태도 남 말 할 처지는 못됐다. 안 그래도 없던 살이 더 쪽 빠져서 반쪽도 안 남았다. 그리고 저렇게 만든 건 나였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피식 웃은 그가 입을 열었다.

“가만히 생각해봤어.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널 거기까지 몰아갔을까. 내가 무의식중에 널 몰아세운 건 아닐까.”

자조적인 웃음으로 시작한 목소리가 조금씩 갈라져 갔다. 아니야. 네가 나쁜 게 아니야. 넌 아무런 잘못 없어. 내가, 내가 이상한 것뿐인데. 왜 네가 그런 얼굴을 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우리가 이렇게 된 걸까 하고.”
“코우쨩이, 네가, 아니야.”

잘못한 건 나야. 차마 끝맺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내 목소리도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런 내 말을 들은 그가 힘없이 웃었다.

“과연 그럴까.”

너를 위해서라고 했던 일들이 사실은 널 갉아먹는 게 아니었을까. 우리 사이를, 적어도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말해야 했던 거 아닐까. 내 친구들에게 널 내 연인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던 이유가 사실은 너를 위한 게 아니라, 단지 내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그의 표정이 왠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널 이렇게까지 몰아갔구나.

“우리의 관계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계속 생각해봤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더라고.”

나도 그랬다.

“우리가 이대로 헤어지면 그걸로 다 해결되는 문제일까? 내가 널 놓으면, 천천히 시간이 흐르면 넌 자연스럽게 날 잊고, 난 널 잊고 다른 사람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와 헤어진다? 그를 놓아준다고? 시간의 흐름에 맡겨 널 지워가야 한다고? 그런 일이 가능해?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난 못해. 설령 우리가 헤어지는 게 너와 날 위한 것이라고 해도 그게 지금은 아니야.”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믿어.

단언하듯 말하는 그의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양쪽 모양과 색이 다른 내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나 혼자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둘이 함께 고쳐나가자. 그렇게 말해오는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맞춰오는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앞으로 내밀어진 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그날 내가 남겼던 손목의 자국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미래의 내가 또 너의 손목에, 너의 몸에, 너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그 손을 잡고 싶은데 잡지 못해 허공에서 불안하게 떨리는 내 손을 보며 그가 말했다.

“날 아직 좋아해?”
“좋아해!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또 내가, 또 저번처럼,”

널 상처입히면 어떡해. 꼴사납게 또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아직 날 사랑한다면, 이 손을 잡아.”

그리고 이런 나약한 나에게 네가 말한다. 계속 나를, 스가와라 코우시를 사랑하라고.

“..읏...”

내게는 그런 그를 거부할 만한 힘도 의지도 없다.

눈앞의 손을 잡아 그대로 당기자 저항 없이 그가 안겨 왔다.

“...ㅋ우, 쨩...”
“응.”

있는 힘껏 그의 몸을 끌어안았고, 그는 팔을 둘러 내 등을 조용조용히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의 손길과 코로 흘러들어오는 그의 체취에 천천히 오열이 잦아들었다.

“코우시.”
“응. 토오루.”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립고 또 그리웠던 그의 다정한 미소가 눈앞에 있었다.

“조금만 더 걸을까.”

그가 내민 손을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얽혀오는 손가락의 온기가, 마주 닿은 손바닥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봄이 오고 있었다.






March 5th, 2017
=============================================
두 번째로 쓰는 하이큐 글입니다!

지금까지 (제 기준으로) 이렇게 단시간 안에 글을 써본 적이 없는데, 쓰면서 조금 놀라웠어요.

밤에 스키마스위치(スキマスイッチ)의 작은 손(小さな手)이라는 곡을 들으며 떠오른 내용입니다. 그냥 트위터에 썰로만 풀고 끝날 줄 알았는데, 다음날 갑자기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스가가 보고 싶어서 쓰게 됐네요. 원래는 헤어지는 엔딩이었는데 그래도 둘이 행복해졌음 해서 그런지, 쓰다 보니 해피엔딩의 루트로..! 뒷 이야기가 없기에 이게 정말 해피엔딩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함께 위기를 잘 극복해낼 거라고 전 믿고 있습니다 🙂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전체 0

error: Content is protected !!